< 목차 >
- 회의론
- 진지외(眞知外)와 소지(小知)
- 언어의 부정
회의론
1) 노자는 지식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그는 일상적인 지식이나 학문, 경험적 앎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노자』 제18장에서 "지혜가 생겨나자 큰 거짓이 뒤따르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제19장에서는 "성스러움과 지혜를 그치면 백성들은 백배나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하여, 인위적 지식의 폐해를 지적하였습니다. 노자는 『노자』 제38장에서 "앞서 안다고 하는 것은 도의 꽃과 같은 것이며, 이는 어리석음의 시초이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지식이란 꽃처럼 겉으로는 화려하나 본질적인 앎이 아니며 곧 시들어버리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일상적 경험이나 이성적 분석으로 획득한 지식은 도에 이르기 위한 참된 앎이 아니라고 보았으며, 『노자』 제56장에서는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으며,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고 하여 지식과 언어의 한계를 지적하였습니다. 또한 제71장에서는 "아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하는 것이 가장 좋으며,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병이 된다"고 하여, 참된 앎은 겸허함 속에 있으며, 일상적 앎을 참된 지혜로 착각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경고합니다.
2) 열자는 노자의 부정적 인식론을 수용하여 보다 명확한 회의론의 입장을 제시합니다. 『열자』 「황제편」에서는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아는 것은 천박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며, 도는 형상이 없기 때문에 감각으로는 인식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중니편』에서는 "도를 좇는 사람은 귀나 눈, 힘이나 마음을 쓰지 않는다"며, 감각기관이나 지식을 통해 도에 도달하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우주의 끝에 대한 질문에 그는 『탕문편』에서 "무라면 끝이 없을 것이고, 유라면 끝이 있겠지만, 그것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라고 답하며, 무한한 우주의 본질에 대해 인간의 인식으로는 알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천서편』에서는 "천지가 무너질 것이라 말하는 것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말하는 것도 둘 다 그릇된 것이다"라고 하며, 우리가 미래의 운명을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합니다. 이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죽음을 알 수 없고, 죽은 후에는 삶을 알 수 없다"고 하여 생사조차 인식 불가능한 영역임을 밝힙니다.
3)장자 역시 일상적인 지식에 대해 깊은 회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북유』에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인가, 아는 것이 곧 알지 못하는 것인가?"라고 하여 지식의 모순적 본질을 제시합니다. 그는 『제물론』에서 왕예와 설결의 대화를 통해,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제로는 모르는 것일 수 있고,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제로는 아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지식의 상대성과 불확실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장자는 우리의 인식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명확히 지적합니다. 『양생주』에서는 "우리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알아야 할 것은 무한하다. 유한한 생명으로 무한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하여, 인간의 인식 한계를 직시할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그는 감각적 인식의 대상 자체가 상대적인 성질을 지닌다고 보았으며, 『제물론』에서는 "유와 무, 성과 폐는 도의 관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는 객관적 판단 기준의 부재를 언급하며, 『대종사』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지만, 그 기준조차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판단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는 모든 인식과 판단이 상대적이며 절대적 기준이 없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습기 많은 곳에서 자면 병이 나지만, 미꾸라지는 아무 탈이 없는 것처럼, 각자의 존재 조건은 다르므로 보편적 판단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감각과 마음이라는 인식 주체와 대상이 항상 변한다는 점을 들어 진정한 앎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제물론』에서는 여희가 강제로 끌려갈 때는 괴로워했지만, 후에는 그것을 후회하게 되었다는 사례를 들어 감정과 판단은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설명합니다.
『대종사』에서는 진리의 기준에 관한 회의론적 논증도 제시됩니다. 그는 "내가 그대와 논쟁하여 내가 이겼다면 내가 옳고 그대가 그른 것인가? 혹은 그대가 이기면 그대가 옳고 내가 그른 것인가? 또는 우리 모두 옳고, 모두 그른 것인가?"라고 하며, 절대적 진리의 존재 자체를 의심합니다.
진지외(眞知外)와 소지(小知)
도가에서는 도에 대한 앎, 곧 진지(眞知)만이 참된 앎이라 하며, 일상적인 지식이나 학문, 감각적 인식에 의한 앎은 불완전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1) 노자는 『노자』 제2장에서 "유와 무, 어려움과 쉬움, 길고 짧음, 높고 낮음, 앞과 뒤 등은 서로 의존하며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이어 제22장에서는 "굽히면 곧게 되고, 파이면 고이게 되며,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하게 된다"고 하여 만물은 상호 의존적이며 상반된 것들이 서로를 낳고 이루는 관계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노자』 제58장에서는 "화는 복의 바탕이고, 복은 화의 바탕이다"라고 하여, 세상의 모든 현상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 속에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옳고 그름, 선과 악, 높고 낮음을 이분법적으로 분별하는 것은 편협하고 근본적 진리를 오도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2) 장자는 이러한 상호대립적 개념을 '작은 지혜(小知)'라고 하며, 무지무욕의 상태에서 마음을 비워 도를 직관함으로써 얻어지는 '큰 지혜(大知)'를 진정한 앎, 즉 진지(眞知)라고 구분하였습니다. 『소요유』에서는 "버섯은 밤낮을 모르며, 매미는 사계절을 모른다"는 비유를 통해, 제한된 시간적 인식 안에서 이루어진 판단은 불완전하다고 말합니다.
장자는 『제물론』에서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면 삶이 있으며, 옳음으로 인해 그름이 있고, 그름으로 인해 옳음이 있다"고 하여, 일체의 개념과 가치 판단은 상호 의존적이고 상대적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또 "태산을 작게, 털끝을 크게 여길 수 있다"고 하며, 인간의 기준은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그는 이분법적 판단을 넘어서기 위해 '도추(道樞)'와 '양행(兩行)'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도추는 도의 지도리, 즉 중심축으로서 만물을 회전시키는 도의 원리이며, 양행은 서로 대립하는 것들이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는 뜻입니다. 『제물론』에서는 "이것은 저것이 되고, 저것은 이것이 되며, 상대 개념이 사라진 것을 도추라 한다"고 하였고, "원숭이들에게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준다고 하자 화를 냈지만,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라 하니 기뻐하였다"는 일화를 통해 언어적 차이가 본질적 차이를 의미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장자는 만물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제물(齊物)' 사상과 자연은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한다는 '천균(天均)' 사상을 통해, 차별과 구분을 초월한 절대 평등과 통일의 세계를 제시합니다. 그는 『동상편』에서 "문둥이와 미녀 서시, 기이한 것과 괴상한 것조차 도의 관점에서는 모두 하나"라고 하며, 참된 앎은 차별을 넘어서 만물을 하나로 보는 통합적 인식임을 강조합니다.
언어의 부정
도가 사상에서는 언어가 지닌 본질적인 한계로 인해 존재의 진실을 정확히 전달하지 못하며, 오히려 존재를 왜곡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형상이 없는 도에 대해 언어로 설명하거나 이름 붙이는 것은 본질을 손상시키는 행위라고 여겨졌습니다.
1) 노자는 『노자』 제1장에서 "도를 도라고 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항상 그러한 도는 아니다"라고 하여, 언어로 표현된 도는 참된 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언어가 대상의 본질을 제한하며, 진리의 전모를 드러내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는 『노자』 제56장에서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노자』 제81장에서는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언어적 표현이 진정성을 담기 어렵다는 점을 말합니다.
2) 장자 역시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북유』에서는 "도는 아득하여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하며, 도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실체이며, 설명하려는 순간 그 본질에서 멀어진다고 합니다. 그는 도를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도를 알지 못한다고 강조하였으며, 『동상편』에서는 "성인은 말 없이 가르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언어의 비유적 한계를 통찰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제물론』에서는 "말은 바람 부는 소리일 뿐이며,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고 하며, 언어는 그저 흐르는 개념적 도구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천도편』에서는 목수가 임금에게 "임금께서 읽으시는 책은 옛사람의 침 찌꺼기에 불과합니다"라고 한 대목은, 문자화된 언어조차도 본질적 지혜와는 거리가 있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장자는 언어는 다만 목적지까지 이끄는 도구이며, 목적지에 도달한 후에는 버려야 할 수단임을 강조합니다. 『외물편』에서는 "물고기를 잡은 후 통발을 잊듯, 뜻을 알게 되면 언어는 버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3) 왕필 또한 언어로는 도, 즉 무(無)의 본질을 드러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주역약례』에서는 "말을 하면 참됨을 잃고, 이름을 붙이면 진실에서 멀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어나 상징이 없으면 의미를 드러낼 수 없다고 보아, 언어는 뜻을 표현하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언어는 상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이며, 상은 뜻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이다"라고 하여, 이 두 수단을 궁극적으로 초월하되, 과정에서는 유용하게 사용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는 『동상편』에서 "언어는 상을 드러내고, 상은 뜻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뜻을 얻은 후에는 상과 언어는 버려야 한다"고 하여, 언어와 상징을 도달 지점을 위한 중간 수단으로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도가 사상은 앎, 지식, 언어, 판단의 전 영역에서 한계를 자각하며, 인간 중심의 언어와 사유로는 도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음을 철저하게 반성적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는 도에 이르는 길은 말이 아닌, 비움과 고요, 직관과 체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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